마태수난곡이 언제 작곡되었고 초연되었는지는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1729년에 초연되었다는 주장이 일반적으로 통용되지만, 이에 대한 증거는 부족하다. 1829년에 멘델스존에 의해 역사적인 재공연이 있을 때, 쩰터는 이 곡이 1729년 성 금요일에 초연되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쩰터가 무엇에 근거하여 그렇게 언급했는지는 알 수 없다. 쩰터가 1729년이라고 기록된 사본을 보았을 수도 있지만 오늘날엔 그런 사본이 전해지지 않다.
  오늘날 연주되고 있는 정본은 1736년에 바흐가 정서한 것이다. 이 자필 사본은 너무도 정교하고 세밀하기 때문에 원본을 보고 필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필사본은 1740년대 것으로 추정되는 다른 자필 사본들의 원본으로 추정되는 데, 바흐는 자신의 이전 작품들을 필사할 때 크든 작든 변개를 하는데, 1736 마태수난곡 정서본은 음악적 내용이 바뀌지 않는 유일한 경우다.
  또 다른 주요 사본은 바흐의 양자 요한 크리스토프 알트니콜이 1744년에서 1748년 사이 라이프찌히에서 공부를 할 때 필사한 것인데, 이것은 1736년 이전의 사본에서 필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사본과 1736년의 바흐 자필 사본에서 몇가지 변화가 있는데, 19번곡에서 트라베르소(바로크 플륫)를 리코더로 교체한 것과 30번 곡의 아리아서 베이스 대신 알토로 바꾼 것 그리고 56번에서 57번 곡에서 류트 대신 비올라 다 감바로 교체한 것이 주요 변개 내용이며 그 외 작은 변화들이 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마태수난곡은 1727년 성 금요일에 초연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1729년 초연에 대한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마태 수난곡의 주요 대본은 1729년 부활절 즈음에 출판된 헨리치(필명: 피칸더)의 대본집 속에 포함되어 있다. 출판된 헨리치의 대본을 접하고 곡을 썼다고 하면 최소한 그 이듬해를 초연한 연도로 잡아야하지만, 바하는 출판되기 전에 헨리치와 논의하여 곡을 완성했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따라서 헨리치의 출판된 대본은 정확한 초연 날짜와 무관한 것으로 여겨진다. 
  플라텐(E. Platen, 1999년)의 연구를 보면, 1729년 3월 24일, 성 금요일 3주전 연주된 안할트-쾨텐의 영주 레오폴드의 추도 예배에서 연주된 추도 음악과 마태수난곡이 관련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음악은 전해지지 않고 텍스트만 전하는데, (바흐 다큐먼터리 II, 258번, 피칸더의 대본) 12개의 텍스트 중 10개가 마태수난곡의 텍스트와 시의 분량, 음절의 수 등을 비롯해 형식이 똑같다. 실제로 세속 칸타타라고 전하는 교회 칸타타에 속하지 않는 칸타타들은 대부분 가사만 바뀌거나 가사와 함께 음악적 구조도 같이 바뀌어 교회 칸타타나 그 밖의 교회 음악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역으로 교회 칸타타가 세속 칸타타로 전용된 적은 없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볼 때, 마태 수난곡은 1729년 이후에 완성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고 그 추도 음악과 거의 동시에 쓰여 졌다고 볼 수도 있다. 

  다시 피칸더의 대본과 관련시켜 보면, 추도 음악의 텍스트를 수난곡의 텍스트로 바꿀 경우에 바하는 피칸더와 의논했을 것이고 바하와 협력 작업이 끝나고 나서, 다시 말하면  수난곡이 연주되고 나서 바로 출판했다고 볼 수도 있다. (나중에 계속)


/이/성/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