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스덴 궁정의 두 작곡가, 첼렌카와 하쎄

얀 디스마스 첼렌카(Jan Dismas Zelenka; 1679-1745)

요한 아돌프 하쎄(Johann Adolph Hasse;16991783)

 

  일반적인 소개

  첼렌카와 하쎄는 출신과 음악적 배경이 서로 다르지만 드레스덴의 궁정에서 음악가로 활동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첼렌카는 보헤미아 출신으로 프라하 인근에서 태어나 프라하에서 음악 교육을 받았다. 1710년에 드레스덴 중정 오케스트라의 비올리네(콘트라베이스와는 다른 바이올린족의 저음악기) 연주자가 되었고, 건강이 안 좋았던 드레스덴 궁정음악감독 하이니헨의 조력자로서 궁정음악감독의 역할을 대행하면서 많은 작품을 쓰고 연주했다. 1729년에 하이니헨이 사망한 뒤에도 계속 그 역할을 대신했지만 끝내 궁정음악감독으로 선택 받지 못했다. 1733년에 하쎄가 드레스덴 궁정음악감독으로 결정되었고 1734년부터 그 역할을 수했했다. 하이니헨은 드레스덴 궁정 예배당의 작곡가로 임명되어 계속 드레스덴 궁정에서 일을 했지만 실망이 매우 컸던 것으로 알려진다.

  하쎄는 북부 독일의 함부르크 인근에서 태어나 1718년 함부르크와 브라운슈바이크에서 가수로서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1721년에 브라운슈바이크에서 첫 오페라 작품 Antioco를 연주하며 가수로서 노래도 했다. 그 후 이탈리아의 나폴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오페라 작곡가로서 성공을 거두었다. 1730년 드레스덴 궁정음악감독으로 요청을 받았고 1734년부터 궁정음악감독으로 일을 하면서 오페라 작곡에 전념을 했다.

 

  드레스덴의 문화적 배경, 음악적 배경

  드레스덴은 1400년대 후반부터 베틴 가문이 다스렸고 1600년대에 베틴 가문이 선제후가 되면서 드레스덴은 작센 지방의 수도가 되었고 정치와 문화가 화려하게 꽃피기 시작했다. 하인리히 쉬츠(1585-1672)가 드레스덴의 궁정음악감독이 된 것은 1615년이고 쉬츠는 1627년 독일 최초의 오페라 작품 Daphne를 드레스덴에서 초연을 했지만 악보는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30년 전쟁 여파로 드레스덴의 음악 규모는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미하엘 프래토리우스, 하이니헨이 궁정음악감독으로 활동을 했다.

  1694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1(또는 용맹왕 아우구스트 2; August II der Starke; 1670-1733)세가 작센의 선제후(황제를 선출할 권리를 가진 제후)가 되면서 드레스덴은 더욱 더 화려한 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아우구스트 2세는 유럽의 전 지역을 도는 대 여행을 하면서 각국의 문화를 살피고 영향을 받게 된다. 특히 루이 14세가 다스리는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정에서 프랑스 드라마와 오페라-발레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드레스덴을 파리와 경쟁할 수 있는 문화 도시로 재건하려는 의욕을 가졌다.

 

  드레스덴 궁정의 음악가들

  1709년에 플레미쉬 출신의 폴루미어(J. B. Volumier) 궁정오케스트라의 악장이 되었는데, 선제후의 취향에 따라 프랑스의 영향을 받는 5성부 현악에 플롯, 오보에가 추가되었다. 첼렌카는 1710년에 비올리네 연주자로 이 악단에 들어왔고 1712년에는 뛰어나 바이올린 연주자 피젠델(Johann Georg Pisendel) 합류했는데, 피젠델은 1728년부터는 폴루미어의 후임으로 이 악단을 이끌었다. 1717년에는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던 하이니헨을 궁정음악감독으로 임명하였다. 선제후의 아들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유럽 여행을 하던 중이었는데, 이탈리아에서 하이니헨의 오페라 작품을 보고 감명을 받아 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Friedrich August II; 1696-1763)는 프리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와 마찬가지로 오페라에 관심을 심히 기울었는데, 특히 이탈리아 오페라에 관심이 깊었다. 궁정음악감독 하이니헨이 사망한 후에 첼렌카를 임명하지 않았던 것도 마음은 이미 이탈리아 오페라에 능숙한 작곡가를 마음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하이니헨의 후임에 임명되기를 바랐던 첼렌카의 바람과는 달리 1730년에 이탈리아에 체류하고 있던 하쎄와 비공식적인 협상을 해서 궁정음악감독으로 내정하였지만 하쎄는 이탈리아에서 활동을 이유로 곧바로 드레스덴에 합류하지 못하였다.

 

  드레스덴 궁정의 두 작곡가

  1731831일에 드레스덴에서는 하쎄의 새 오페라 Cleofide가 초연되었다. 이 자리에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바흐 역시 드레스덴 궁정음악감독 자리에 마음을 두고 있었을 것으로 집작되지만, 역시 드레스덴 선제후와 선제후의 아들은 오로지 이탈리아의 오페라에만 관심이 있었다. 하쎄는 다시 드레스덴을 떠나 투린과 로마 등에서 다음 작품들을 초연하였는데, 이미 드레스덴의 궁정음악가로 확정이 된 상태였다. 1733년 용맹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가 사망하여 1년간의 애도 기간을 지낸 후 1734년 하쎄는 드레스덴의 궁정음악감독으로 정식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나 다시 드레스덴을 떠나 1735년부터 1737년까지는 이탈리에에 체류하였다. 1737년에 다시 드레스덴으로 돌아와서 1738년 궁정이 폴란드로 잠시 옮겨갔을 때와 17441년간 베니스를 방문한 때를 제외하고는 쭉 드레스덴에 머물렀다.

  첼렌카는 1735년에 궁정 예배당의 작곡가칭호를 받았고 그 전에 해오던대로 궁정예배당과 행사를 위한 교회음악 작품을 꾸준히 작곡해서 연주하였다. 그러나 첼렌카는 서운함과 함께 경제적으로도 만족스럽지 못한 대우를 받으며 점차 오페라에 경도된 드레스덴 궁정에서 존재감이 잊혀졌다.

1745년 첼렌카는 드레스덴에서 독신으로 사망했다. 말년에도 많은 작품들을 썼지만 전혀 연주되지 않았다. 그의 작품은 삭손의 선제후 부인 Maria Josepha of Austria가 모두 사들였는데 궁정의 소유로 간주되고 공개되지 않았다. 그래서 첼렌카는 결국 한 동안 잊혀진 작곡가가 되었다.

17567년 전쟁이 발발하여 드레스덴 궁정으로 폴란드의 바르샤바로 옮겨갔고 하쎄는 다시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오페라 연주를 감독하기 위해 폴란드로 여행했다. 1760년에 빈으로 옮겨서 2년을 머물고 1763년에 드레스덴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드레스덴의 집은 파괴되었고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가 사망하자 드레스덴의 음악적 환경도 변하여 오페라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다. 1764년에 하쎄는 드레스덴을 떠나 빈으로 가서 1773년까지 빈에서 오페라 작곡가로 활동했다. 빈에서는 오페라 작곡가로 성공하였고 주요 작품들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쓰였다. 하쎄는 오페라 작곡에 점차 흥미를 잃어갔지만 빈을 떠날때까지는 오페라를 계속 썼다.

  1773년에 인생의 마지막 10년을 다시 이탈리아 돌아가서 베니스에 머물며 교육과 작곡에 전념했고 이 시기에는 교회음악 작품으로 주로 썼다.

 

 /이/성/실/ 2013 /